월간옥키 60 취소
정해진 사건이나 약속을 무르는 취소.
취소가 발생하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봤습니다.
자의로 일어나는 취소가 있기도 하고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혹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취소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사정과 이유로 인해 취소가 발생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약속 당사자 간의 양해와 이해라는 생각을 합니다.
취소로 이르는 과정과 취소 이후, 관계자가 서로 양해를 구하고 이해를 하는 태도에 따라
각자가 취소라는 사건을 받아들이게 되는 방식이 달라질 것입니다.
관계에서의 태도.
‘취소’를 통해서 우리는 관계에 대해 서로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어느덧 60번째를 맞이하는 월간옥키의 이번 주제는 취소입니다.
이 책을 보는 시간이 참여 작가들이 바라보는 세상의 관계와 그를 대하는 모습은 어떠한지, 그리고 여러분이 생각하는 관계에서의 태도는 어떤 모습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2026년 8월
장인주
에그그/Eggg
egggartist

<여전히 남아 있어>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수많은 사건과 사람을 만나고,
그 관계 속에서 무언가를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한다.
오래 간직하고 싶었던 순간은 생각보다 쉽게 흐려지는데,
정작 잊고 싶은 순간은 이상하리만큼 선명하게 남는다.
생각하지 말아야지,
이제 그만 생각해야지,
마음속에서 몇 번이고 취소를 눌러보지만
그럴수록 꼭 다시 생각난다.
어떤 기억은 밤새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기도 한다.
그림 속에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지나가고 있다.
누군가는 가까이 있고, 누군가는 이미 멀어졌고,
그 한가운데 내가 서 있다.
The dream keeps me around.
Dear, I can wait.
어쩌면 취소하고 싶은 것은
지나간 사건이나 사람이 아니라
그 안에 아직 남아 있는 나의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모든 것을 지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지워지지 않는 기억까지 데리고
나는 또 다음 장면으로 걸어가면 되니까.
취소되지 않은 마음들이
언젠가는 나를 괴롭히는 기억이 아니라
내가 여기까지 걸어왔다는 흔적이 되기를.
그때까지는,
조금 더 기다려봐도 괜찮겠다.
300x300mm pigment print

<그래도 지나가>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다고 해서
그 시간이 정말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고,
어떤 장면은 생각보다 오래 우리 곁을 맴돈다.
그래도 시간은 간다.
기차가 어둠을 가르며 지나가고,
하루의 마지막 빛도 천천히 저물어간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사이
풍경은 조금씩 다른 모습이 된다.
잊어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기억한 채로도 지나갈 수 있다는 것을
요즘은 조금 알 것 같다.
남아 있는 것들은 그대로 두고
나는 나의 속도로 다음 장면을 향한다.
여전히 남아 있어.
그래도 지나가.
어쩌면 살아간다는 건
이 두 문장 사이를 계속 걷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420x297mm pigment print

<기억>
어떤 것은 여전히 남아 있고,
그럼에도 시간은 지나간다.
그렇게 지나간 것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사람도, 마음도, 함께했던 시간도
처음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지는 않는다.
선명했던 얼굴은 흐려지고
사소했던 장면 하나가 오히려 오래 남기도 한다.
기억은 참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간직하고 싶은 것은 조금씩 희미해지고
잊고 싶었던 것은 불쑥 피어나
나를 오래 바라본다.
그래서 기억을 꽃처럼 그려본다.
한때의 마음들이 겹겹이 피어나고,
빛나고, 흐려지고,
서로 뒤섞여 이제는 하나의 풍경이 되어버린 모습.
Remember me?
기억하고 있냐고 묻는 것이
지나간 누군가의 목소리인지,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건네는 말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제는 알 것 같다.
지나간다고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남아 있다고 계속 그 자리에 머무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을 가지고도
계속 다음으로 걸어간다.
여전히 남아 있어.
그래도 지나가.
그리고, 기억한다.
300x300mm pigment print
허진
@lumimaster


1-2.
눈이 펑펑 내리는 밤, 카메라를 챙겨 거실 창밖을 내려다본다.
‘이대로 계속 쌓이면, 내일 출근은 어려우려나?’
하지만 다음 날 아침이 되면 거짓말처럼 길은 치워져 있고, 아무렇지 않게 출근길에 오른다.
주말 저녁 내리는 눈을 보며 누군가는 약속 취소를 걱정하겠지만,
일요일 아침 일찍부터 테니스장 눈을 치우는 누군가는 차라리 눈이 낮 동안 내내 내리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3-4.
비 내리던 오후, 카페 음악이 뚝 끊기고 내부가 어두워졌다.
건물 전체는 물론 인근 빌딩 몇 곳이 한꺼번에 정전된 것이었다.
급히 한전에 전화를 걸었고, 얼마 뒤 수리기사님들이 도착해 작업차를 타고 올라가 점검을 시작했다.
전기가 금방 돌아오기는 어려울 거라는 말에 윗집 사장님은 저녁 예약 손님들에게 취소 안내 연락을 돌리셨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다행히 전기가 복구되었다.
다시 불이 켜진 거리에 밤늦게까지 비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297x420mm pigment print
김기봉
@bongsweetie


취소는 철회
01 선택의 철회: 반품
02 공간의 철회: 물러남
297x420mm pigment print
Bluemoon
@bluemoon617135

Blue Avenue 2 : 파도바의 오후 일정은 취소되었다
Pigment Print, Acrylic on Canvas_28x38x4 cm
Necklace : 취소하고 싶다. 12년 전에 한 말…
92.5% Silver, Copper, Wire_29x39cm
김선우
@seonu_pic lens06@naver.com

해 질 녘, 텅 빈 주차장을 가만히 바라본다. 매일같이 반복되던 삶의 움직임과 번잡했던 온기가 한순간에 수거되어 버린 듯, 공간은 이내 낯선 정적 속에 휩싸인다.

어둠이 옅게 깔리는 동네의 어스름 속을 천천히 거닐며, 사람들의 온기가 떠나간 빈자리들을 하나씩 눈에 담아본다. 시간이 멈춰 선 듯한 그곳의 풍경들, 저마다의 삶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린 채 쓸쓸한 기억을 품고 서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 고요함은 쓸쓸함에만 그치지 않고, 지친 마음을 가만히 보듬어주는 깊은 쉼과 사유의 시간을 가만히 건네온다.
297x420mm pigment print
하동수
@dongsoo90ha

1910년은 경술국치의 해다. 국권이 빼앗겼고 주권이 취소됐다.
이석영 선생과 형제들은 막대한 재산을 처분하고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했다.
이는 개인의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취소한 것이다.
남양주의 REMEMBER 1910이라는 공간엔 권력을 쥐었던 가해자 친일파를 투옥시키는 공간이 있다.
역사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피해자의 편에서 다시 쓸 수 있고 복권할 수 있다.
후손으로서는 거짓 정당성의 취소, 잘못된 역사적 사건의 취소, 그리고 우리들 정신 기저의 패배감과 우울을 취소하고자 한다.
594x840mm pigment print
이동혁
@daysbyphoto




- 멈춰있던 시작
- 남겨진 교실
- 다시 스며든 빛
- 새로운 걸음
중학교 3학년 겨울, 갑작스럽게 찾아온 병으로 나의 학교생활은 멈추게 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서도 오랫동안 교실로 돌아가지 못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1학년 4반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는 교실, 아무도 없는 공간, 복도 사이로 들어오는 빛, 그리고 다시 마주한 3학년의 신발장.
이 사진들은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는 기록이 아니라, 멈춰 있던 시간에서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담은 기록이다.
비어 있던 순간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내일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시간이 되었다.
297x420mm pigment print
장인주
@mumallang_e

하나의 사건과 여러 개의 의견.
2020년 10월 4일 을지로에서.
594x420mm pigment print
김태휘
@g.gshine




도시는 건물을 철거하기 전에 시간을 먼저 취소한다.
도시의 취소는 느리게 진행되며, 부스러기를 남긴다.
나는 그 부스러기를 바라본다.
01. 예고된 공백
02. 멈춰 선 시간
03. 남겨진 규칙
04. 기억의 질량
297x420mm pigment print
